“해겸 청자와 불때기에 대한 소고”(2025)


이용범(도자 평론가)

해겸 김해익(경주시 건천읍 해겸도요)은 50년 경력의 도공으로 고려 비색(翡色)청자를 30년째 연구하며 불을 때고 있다. 그의 불때기 방법은 세상에서 유일하며 그의 청자는 요즘 우리가 접하는 현대청자와 달리 박물관 등에서 만나는 고려시대 청자, 즉 비색(翡色)·상감(象嵌) 청자와 상당히 닮아있다.

[ 세계에서 하나뿐인 불때기 ]

칸가마, 통가마, 일본의 아나(穴)가마 등 장작을 때는 가마의 경우 봉통(아궁이)에 장작을 던져넣어 불을 땐다. 그런데 해겸은 가마 내부 봉통에서 불을 때는 것이 아니라 가마 밖에서 불을땐다. 정확하게는 가마 입구에서 40~50cm 거리에 세로로 벽돌을 11자로 놓고 그 위에 통장작을 가로로 놓고 21일동안 불을 땐다. 그리고 마지막 날 녹힘불을 땔때에만 봉통에 장작을 밀어넣는다. 이때에도 가마 밖에서 11자 불때기는 유지하면서 통나무가 타서 내려앉아 상부에 틈이 생기면 장작을 밀어넣으면서 산소를 최대한 통제한다. 이러한 불때기는 세계에서 유일하다.

해겸이 이렇게 특이한 방식으로 불을 때는 이유는 8m길이의 통가마를 고르게 축열하기 위함이다. 봉통 안에 장작을 넣게 되면 가마 입구쪽 온도는 높고 뒤쪽은 낮아 온도 편차가 심해 창불때기를 통해 이를 조정하는데 청자의 경우 창불때기를 하면 산소가 유입되어 환원소성1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비색청자를 얻는 것이 어렵다.

이에 해겸은 창불구멍을 없애고 가마 뒷쪽까지 앞부분과 균일하게 1,250℃이상 고온으로 축열하기 위해 가마 밖에서 가마 입구와 평행하게 통장작으로 천천히 불을 때는 방법을 발전시키게 된다.

해겸은 고려 비색 청자를 재현하기 위해 비색청자를 만든 강진의 가마터를 찾아다녔으며, 도요지 발굴조사 보고서를 뒤지고, 가마 주변에 떨어진 도편(陶片)들을 주워와 자신이 구운 도자기와 비교하며 가마와 불때기를 연구했다. 해겸은 “불때기는 가마 입구를 달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선친의 말씀을 화두로 불때기에 정진하던 어느날 부친 밑에서 도자기를 배우던 시절 당시 정양모 경주박물관장께셔 들려주신 말씀이 불현듯 생각났다.

“강진의 청자 가마들을 발굴할 때 가마 입구에 11자가 놓여있었는데 그 용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 말을 잣대로 삼아 가마 입구 11자 불때기를 시도하게 되고 드디어 2007년 비색청자를 구워내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후에도 그는 거듭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11자 불때기의 완성도를 높여가고 있다.

[ 도자 전통 계승 ]

도자기는 우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고품격 문화상품으로 우리 선조들은 토기·청자·분청사기·백자 등 우수한 도자기를 만들었는데, 그중에서 한국 도자기를 대표하는 것은 고려 비색(翡色)·상감(象嵌) 청자라 할 것이다.

해겸(도공 김해익, 1956년생)은 5대째 도자기를 만들고 있는 도공 집안 출신으로 17세 때 불을 때기 시작해 50년이 넘는 세월을 불 앞에서 보내면서 고려 청자 재현에 평생을 바쳐왔다. 해겸은 고려청자가 신라의 경질토기에서 회유(灰釉)토기(잿물유약토기)를 거쳐 청자로 발전해간 사실에 착안하여 환원소성 불때기로 신라의 회색 경질토기와 회유토기 재현 기술을 완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2007년 비색(翡色)청자 재현에 성공하게 된다.

청자 쌍사자 베개 (2007년) 해겸 김해익 작품 (사진 박민준)

우리 선조들이 수백년에 걸친 오랜 시간을 거쳐 완성된 고화도 환원(還元) 불때기 과정을 해겸은 도공 가문에서 축적한 불때기 기술과 더불어 50년간 평생를 바친 노력을 통해, 토기에서 시작하여 갈유(褐釉) → 녹유(綠釉) → 청자(靑瓷)에 이르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밟아 비색청자의 핵심 기술인 환원 불때기와 태토·유약에 숨겨진 비법(秘法)을 터득, 마침내 비색(翡色)청자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 보다 완성도 높은 고려 청자 재현에 매진하여 당대 천하제일이라 칭송받았던 비색청자는 물론 상감청자까지 다양한 고려 청자를 재현하고 있다.

고려청자는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한 통일신라의 회유(灰釉)토기에서 축적된 기술적 기반위에 중국 청자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졌는데, 해겸은 신라의 경질토기가 통일신라에서 잿물유약을 입힌 회유(灰釉)토기로 발전하고, 고려 청자로 나아가는 자생적 청자의 발전 과정을 밝히고 청자 재현에 성공, 우리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해겸은 고려 청자의 핵심이 고화도 환원 불때기임을 입증하였으며 전통 통가마에서 21일간 장작으로 불을 때는 기술을 완성하고 2016년 「비취색 고려청자 제조방법」 으로 특허를 받았으며 이러한 불때기 기술을 활용하여 청자는 물론 분청사기·백자·천목 등 기능성과 예술성이 높은 다양한 전통 도자기를 제작하고 있다.

백자 다기(茶器) 세트, 해겸 김해익 作

[ 신라 경질·회유 토기 재현 ]

신라 경질토기 재현

신라는 4~5세기에 이르면 600~1,000℃의 낮은 화도에서 산화 불때기로 구워낸 저화도 토기 단계를 넘어 1,000℃ 이상의 고화도 환원 불때기를 통해 밝은 회청색의 경질토기를 생산하는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경질토기 제작에 사용된 고화도 환원 불때기 기술은, 회유토기의 유약기술과 함께 청자를 만드는 핵심기술이 된다.

해겸은 17살부터 도공의 길에 들어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특히 경질토기를 만들면서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통해 태토와 불때기를 제대로 배우게 된다.

토기는 유약을 바르지 않기 때문에 불이 태토에 미치는 영향을 바로 느낄 수 있으며, 제대로 만들어진 신라 경질토기들이 검거나 짙은 회색이 아니라 밝은 회색을 띠고 있는데 이를 재현하는 과정에서 고화도 환원 불때기의 기초를 익히게 된다.

해겸은 통가마에서 장작으로 10일이상 불을 때는 고화도 환원 불때기를 통해 밝은 회청색을 띤 신라 경질토기를 재현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신라 자연유(⾃然釉)·회유(灰釉)토기 재현

600~1,000℃의 낮은 화도에서 산화 불때기로 구워낸 저화도 토기 단계를 넘어 1,000℃ 이상의 고화도 환원 불때기 단계에 이르면 가마에서 생겨나는 재티가 고온의 토기 표면에 내려앉아 녹아붙어 자연유(自然釉)가 된다. 이를 보고 잿물을 만들어 유약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이를 잿물유약 또는 회유(灰釉)라 한다. 이 잿물을 토기 표면에 바르고 고온으로 구워내면 회유토기(灰釉土器)가 되는데, 이 회유토기가 청자로 발전하게 된다.

회유(灰釉)토기는 태토와 유약·불때기에 따라 색상이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색상에 따라 녹유(綠釉), 갈유(褐釉) 등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해겸은 토기를 굽는 20여년동안 경기·전라·경상·충청·강원 등 전국의 흙들을 가져다 태토에 대한 실험을 하면서 토기는 물론 청자·백자·분청사기의 흙들을 찾아나갔다. 기물이 녹아내리고 가마가 무너져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태토와 불의 관계를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약을 바르지 않은 기물(器物) 표면에 날아가 쌓인 재가 녹으면서 누런색과 갈색을 띠는 걸 보면서 회유(灰釉)토기를 이해하게 되었고, 때때로 녹색과 파란색을 띠는 걸 보면서 녹유(綠釉)와 청자의 가능성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토기 기물 위에 쌓인 재가 녹으면서 다양한 색상을 나타내는데 환원 소성이 충분할 경우는 재가 녹색으로 나타나고 다른 경우에는 누런색이나 갈색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통해 환원 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되며, 잿물 유약을 사용하고 환원 불을 때게 되면 녹유(綠釉) 토기가 만들어지게 된다는 것을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부친과 함께 녹유 토기를 연구하고 만들면서 유약과 불때기의 관계를 더욱 심도있게 배우게 된다. 제대로 된 환원 불때기에서 녹유 특유의 윤기 나는 녹색이 발현되고 다른 경우에는 누런색이나 갈색으로 발색되는 현상이 경질 토기 위에 재가 녹으면서 나타나는 현상과 동일함을 확인하면서 온전한 환원 소성에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된다.

해겸은 환원 불때기 기술을 연구하여 경질토기를 재현한데 이어 갈유, 녹유 등 회유(灰釉)토기를 재현함으로써 청자 재현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 고려 비색(翡色)·상감(象嵌) 청자 재현 ]

고려 비색(翡⾊)청자 재현

신라의 경질토기와 통일신라의 회유토기 재현에 성공한 이후 경질토기의 태토를 익히는 기술과 회유토기의 유약기술을 바탕으로 청자 재현에 도전하게 되는데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친 끝에 17일간의 고화도 환원 불때기를 통해 2007년 마침내 비색청자 재현에 성공하게 된다.

해겸은 녹유토기의 태토(胎土)에서 점토 비중을 줄이고 고령토의 양을 조절하는 등 청자 태토를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을 거쳤으며, 유약(釉藥)의 경우도 잿물 양을 줄이고 장석·석회석 등을 비중을 조절하는 과정을 통해 비색 청자를 재현할수 있는 최적의 태토와 유약을 찾아내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고려 비색청자를 구워낸 강진의 가마를 연구하여 제작한 통가마에서 17일~21일 동안 장작으로 불을 때는 고화도 환원 불때기 기술을 완성함으로써 마침내 최상급 고려청자에서 보여지는 얇은 유막(釉膜)과 투명한 유색(釉色)을 지닌 비색 청자를 구워내는데 성공했다.

청자의 비색(翡色)은 온전한 환원 불때기가 이루어져야 완성되는 최상의 하이테크 기술로 당대 국제사회에서 천하제일로 평가받았던 고려 비색청자 재현은 전통의 계승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고려 상감(象嵌)청자 재현

비색청자 재현에 성공하자 해겸은 이를 바탕으로 상감청자 재현에 도전하게 된다. 고려시대 도공들은 12세기에 독창적인 상감 기법을 창안하여 청자를 만들기 시작해서 13세기에 상감청자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상감청자는 반 건조된 기물 표면에 무늬를 음각한 후, 그 안을 백토(白土)나 흑토(黑土)로 메우고 초벌구이를 한 다음, 청자 유약을 발라 재벌 구이를 하여 상감한 무늬가 유약을 통해 드러나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해겸은 비색청자 재현에 이어 상감청자 재현에도 성공함으로써 선대로부터 이어져온 고려청자 재현이라는 오랜 숙원을 마침내 이루게 된다. 해겸은 최상급 고려 상감청자에서 보여지는 얇은 유막(釉膜)과 투명한 유색(釉色)으로 상감문양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아름다운 상감 청자를 구워내는데 성공했다.

[ 고려청자와 현대청자, 그리고 해겸 청자 ]

우리가 접하는 청자는 해방이후 만들어진 현대 청자와 박물관 미술관 등에서 볼 수 있는 고려 청자로 나눌 수 있다. 고려청자와 현대청자는 언뜻보면 비슷하지만 찬찬히 살펴보게 되면 많은 점에서 다르다.

박물관·미술관 등에 전시중인 고려청자와 도요지의 도편(陶片)들을 보면 제작기술의 수준, 태토나 유약 등도 색상과 완성도에 영향을 미치지만 같은(혹은 유사한) 태토와 유약을 사용했더라도 불때기에 따라 녹청색에서 담녹색·암녹색·회녹색·청회색·녹회색·녹황색·담황색·녹갈색 등에 이르는 다양한 색깔을 띠고 있으며 비색 청자는 드물다는 것을 알수 있다.

고려 청자를 대표하는 도자기중 하나인 《청자양각죽절문병》(국보 제 169호)의 경우를 살펴보면 동일한 태토와 유약을 사용하고 있는데도 불때기에 따라 하나의 기물에서도 위치별로 어떻게 색이 변화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기물(器物)은 성형을 마친 상태에서나 초벌구이를 하고 유약을 시유한 상태에서는 전체적으로 동일한 색상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때기를 통해 자신의 색을 드러내게 되는데 전체적으로 비색을 띠고 있으나 부분적으로는 산화에 의한 누런색·갈색 등이 나타나는 것이다.

동일한 태토와 유약을 사용한 하나의 기물(器物)에서도 위와 아래, 그리고 앞과 뒤의 색상이 다른 것은 불의 작용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통해 기물의 미적(美的)인 완성도와 질적(質的)인 완성도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불때기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수 있다.

지금 이천·광주·여주·강진·부안 등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현대 청자는 고려 청자의 아름다움을 계승하기 위해 우리 도예가들이 해방이후 수십년간의 노력을 통해 이룩한 성과로 청자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또한 다기(茶器)·식기(食器) 등으로 실생활에 사용할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대 청자는 예술적·기술적 완성도에 있어 고려청자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을 듣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고려 비색청자의 맑고 깊은 맛과 품격에 못 미치고 있어 비색(翡色) 청자 재현은 여전히 많은 도예가들에게 꿈이자 도전 과제로 남아 있다.

현대 청자는 대부분 가스 가마로 하루만에 구워내며 일부에서는 장작 가마로 3~7일 정도에 걸쳐 구워내기도 하는데 고려 청자와는 태토·유약이 다를뿐 아니라 특히 가장 중요한 불때기 기술이 달라 고려 청자에 비해 유막(釉膜)이 두껍고 유색(釉色)이 불투명해 다른 종류의 도자기, 즉 현대청자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다 할 것이다.

이에 반해 해겸이 만든 청자를 고려 청자의 재현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고려 청자와 유사한 태토와 유약을 사용하고 21일간의 불때기와 21일간 익히는 환원 불때기를 통해 고려 청자와 유사하게 유막이 얇고 맑아 은은한 비색을 지니고 있으며 강도·내구력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그가 칸가마나 가스·전기 가마 등 편리하고 경제적인 방법을 두고 엄청난 노력과 시간·예산이 소요되는 고난도의 불때기 방법을 고집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전통을 계승한 진정한 고려청자를 재현할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 국내·외의 많은 도예가들이 청자 재현에 도전하였으나 고려 비색(翡色)청자 재현에 실패하였으며, 이에 대안으로 두터운 유약으로 청색을 띤 현대 청자를 제작하였는데, 예술적으로나 기능적으로 고려 비색청자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의 사례에서 보듯 고려 청자는 마치 유약을 바르지 않은 듯 흑백상감이 희고 검게 뚜렷하게 보이는 반면 현대 청자는 두터운 코발트 유약으로 청자색을 내기 때문에 유색이 탁한데다 흑백상감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고려청자와 감히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수 있다.

물론 도예가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고려 청자, 나아가 비색(翡色) 청자를 재현한 현대 도예가는 국내·외 어디에도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현재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이들 도자기들의 태토와 유약 성분은 상세하게 밝혀져 있는데도 재현에 성공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불때기’에 있다 할 것이다. 고려 청자 수준의 도자기를 굽기 위해서는 정밀한 제어가 요구되는 온전한 고화도 환원 불때기 기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맑고 은은한 비색 발색을 위해서는 온전한 환원 소성 과정을 거쳐야 하고, 온전한 환원 소성을 위해서는 밤낮없이 21일 동안 전심전력(全心全力) 장작불을 때고 21일간을 익혀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온전한 환원 소성을 통해 만들어진 해겸의 도자기는 비색(翡色)을 포함한 고려 청자의 다양한 색상을 대부분 구워내고 있으며, 상감청자의 경우 고려 청자와 마찬가지로 유약을 바르지않은 듯 흑백상감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어 현대 청자와는 다른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국보 114호 《청자상감 국화모란문 참외모양병》의 경우 해겸의 재현작품이 고려청자 진품보다 오히려 색상과 상감 상태가 우수하다.

[ 청자 유막(釉膜)의 두께·투명도와 불때기의 관계 ]

고려청자와 현대청자의 가장 큰 차이는 유막의 두께와 투명도이다. 고려청자는 유막의 두께가 얇고 투명하여 태토의 색이 잘 드러나 순청자에서는 비색의 아름다움을, 상감청자에서의 문양의 아름다움을 잘 느낄수 있다. 반면에 현대청자는 유막의 두께가 두껍고 불투명하여 태토가 보이지 않으며 상감청자의 문양이 탁하고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다.

고려청자도 현대청자와 마찬가지로 유약이 두텁게 시유된 것으로 추정되는데도 현대청자와 달리 유색이 투명하고 마치 유약층(유막)이 없는 듯 얇게 보이는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해겸의 21일간 불때기에서 보듯 고려청자는 오랜 불때기를 통해 유약 내의 불순물을 모두 태워버리기 때문이며, 둘째는 태토가 충분하게 익혀진 상태에서 두터운 유약이 내부에서부터 녹아내려 태토의 미세한 틈 사이로 스며들어가기 때문이다. 태토가 충분히 익지 않은 상태에서 녹힘불을 때게 되면 두터운 유약이 외부에서부터 녹으면서 태토 내부로 스며들지 않아 유약층이 두터워 불투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고려 상감청자를 보면 오랜 시간에 걸친 온전한 환원 불때기를 통해 유막이 얇아지고 투명해서 상감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며, 현대 청자는 두텁고 불투명한 유막으로 인해 상감이 탁하고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다.

순청자(純靑瓷)에서 비색(翡色)의 아름다움이 더욱 잘 드러나는데 얇고 투명한 유색(釉色)으로 인해 태토가 드러나 청자의 형태를 돋보이게 하며, 문양이 없어도 깊고 그윽한 아름다움으로 맑고 순수하고 신비한 미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얇고 투명한 유색에서 비롯된 맑은 비색(翡色)은 깊고 차분한 느낌을 주며, 상감(象嵌)이나 음각·양각 등의 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한다. 철화(鐵畵)나 퇴화(堆花) 등의 기법도 유색이 맑고 투명했기 때문에 선명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 청자가 우아하고 품격높은 조형미로 천하제일이라는 평가를 받게된 것은 맑고 투명한 비색(翡色)을 구현할수 있는 최고 수준의 환원 불때기 기술 덕분이라 할 것이다.

[ 해겸 청자와 불때기에 대한 평가 ]

해겸이 재현한 고려청자와 불때기 방법은 그동안 전시나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일부 알려지기는 했지만 아직 다른 도예가들과 학자들에 의한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도요지에 고려시대의 가마 형태가 남아있기는 하나 상부가 남아있는 경우가 없어 창불때기 여부를 알수 없으며, 태토와 유약은 과학적인 분석이 이루어져있으나 청자와 관련한 불때기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이를 검증하거나 평가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도자기 불때기는 신라토기를 굽는 통가마 불때기를 제외하고는 조선 중기 이후의 불때기 기술이 전래되거나 일본을 거쳐 역수입된 불때기 기술이라 고려 청자의 불때기 기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가 구워낸 청자 작품들로 미루어볼 때 해겸 청자는 현대청자와 달리 고려청자와 상당히 닮아있는 것이 사실인바, 해겸의 불때기가 고려 청자를 구운 불때기 기술에 가장 근접한 방법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특히 청자 비색의 비밀은 과학적인 검증에 의해 환원 소성의 결과로 알려져 있는 바 그의 불때기는 현재 알려진 어떠한 도자기 불때기보다 환원 소성이 충분하게 제대로 이루어질수 있는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불때기의 큰 진전이라 할 수 있다.

[ 천하제일, 비색(翡色, 秘色) 청자 색(色)의 비밀 ]

“프랑스 국립(國立) 세브르 도자요업소, 고려청자色 130년 연구해도 못밝혀”

12세기에 이르러 비색(翡色) 청자로 절정기에 도달한 고려청자는 당대에 천하제일(天下第一), 즉 세계 최고의 도자기로 평가받았다.

고려 청자의 뛰어난 품격과 아름다움에 대해 당시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이자 도자기의 종주국이라 자부하던 중국에서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송(宋) 왕실은 다량의 고려청자를 수입하여 사용했다. 남송(南宋)의 수도였던 절강성 항주(杭州) 유적에서 다량의 고려청자가 발굴되어 이를 잘 입증하고 있다.

남송(南宋)시대의 학자인 태평노인(太平老人)은 당시의 분야별 최고 명품들을 기록한 「수중금(袖中錦」2 에서 “낙양의 꽃, 건주 차(茶), 정요(定窯) 자기, 절강 칠기, …고려 비색(秘色)… 모두 천하제일인데 다른 곳에서는 따라 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라며 중국에서 명품 청자로 이름을 날린 월주요·여요 등의 청자가 아니라 고려 청자를 천하제일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은 1123년에 고려 개경에 한 달 간 다녀간 뒤에 송 휘종(徽宗)에게 바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도기(陶器)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는데, 근래에 들어 제작 기술이 정교해져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3 라며 고려청자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청자의 색상은 청색(靑色), 즉 푸른 색이지만 일반적으로 푸르다고 하는 하늘색 혹은 블루와는 다르며, 맑은 녹청색(綠靑色)에 가까운 색상을 띠고 있다. 당대에는 이를 비취(翡翠)옥 색에 가깝다고 하고 이를 비색(翡色)이라 불렀으며 혹은 신비로운 색이라하여 비색(秘色)으로도 불렀다.

고려 중기의 대문장가 이규보와 고려말의 목은 이색 등이 청자를 벽옥(碧玉), 즉 파란 옥색이라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비색(翡色)이 푸른(블루, 코발트) 색이 아니라 비취색 혹은 파란 옥색임을 알수 있으며 박물관에서 만나는 고려 청자도 청색(靑色)이 아니라 맑은 녹청색(綠靑色), 즉 파란 옥색(碧玉)에 가깝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청자는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 청자들로 비색을 띠고 있거나 비색에 가까운 것들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고려 청자들이 대부분 비색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많이 다르다. 즉 비색 청자는 매우 드물었고 누런색과 갈색, 심지어 검은색에 가까운 청자들도 만들어졌다.

국내외 박물관·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최상급 청자들의 경우도 자세히 살펴보면 기물 전체가 고르게 비색(翡色)을 띄고 있는 작품은 극히 드물고, 대부분 윗면과 뒷면, 혹은 굽 바닥면 등에 누런 빛을 띄고 있거나 유약이 뭉치거나 흘러내리는 등 색상이 균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수 있다.

또한 최상급 비색 청자들의 경우도 동일한 색상을 지닌 작품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미세하지만 다양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태토와 유약이 아니라 불에 의해 색상이 결정되는 청자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같은 유약과 태토를 사용하고 동일한 가마에서 소성한 청자도 모두가 다른 색상을 띄고 있는 것이 청자의 특성이라 할 것이다.

현대 청자의 경우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같은 가마에서 소성할 경우 대부분 우리가 눈으로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의 동일한 색상을 띄고 있는데 비해, 고려 청자와 해겸 청자에서는 같은 색상을 찾아보기가 오히려 어렵다.

현재 국내외 박물관과 개인들이 소장하고 고려시대 청자와 도편 등을 살펴보면 청자 전성기인 12~13세기에도 비색(翡色, 녹청색) 비율은 1~3%. 담록색·담청색 등을 포함해도 10% 이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나머지는 암녹색·회녹색·청회색·녹회색·녹황색·담황색·녹갈색 등 다양한 색상의 청자가 만들어졌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최고급 도자기를 만드는 국립(國立)세브르 도자요업소(Manufacture nationale de Sevres)의 안료연구소에는 1740년대부터 구축한 색 팔레트, 즉 안료데이터가 구축돼 있다. 수집된 안료는 1,000여 개이고, 현재 실제로 상용되는 컬러는 100여 개. 여전히 1700∼1800년대 전통기법으로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세브르가 곱고 아름다운 빛 또한 과거의 것 그대로를 구현해 낼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지난 300여 년의 세월 동안 전통 안료와 도자 기법을 연구하여 1000개의 안료를 보유한 세브르조차 도무지 그 재료를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색이 바로 고려청자라고 한다. 안료 연구실에서 만난 한 연구원은 “세브르에 처음 고려청자가 들어온 130년 전부터 청자색을 찾으려는 연구가 계속됐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4

[ 해겸 비색(翡色)청자 재현의 의미 ]

도자기는 우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고품격 문화 상품으로 우리 선조들은 토기·청자·분청사기·백자 등 우수한 도자기를 만들었는데, 그중에서 한국 도자기를 대표하는 것은 고려 비색(翡色)·상감(象嵌) 청자라 할 것이다.

해겸(도공 김해익, 1956년생)은 5대째 도자기를 만들고 있는 도공 집안 출신으로 17세 때 불을 때기 시작해 50년이 넘는 세월을 불 앞에서 보내면서 고려청자 재현에 평생을 바쳐왔다.

해겸은 고려청자가 신라의 경질토기에서 회유(灰釉)토기(잿물유약토기)를 거쳐 녹청자·청자로 발전해간 사실에 착안하여 환원소성 불때기로 신라의 회색 경질토기와 회유토기 재현 불때기 기술을 완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2007년 비색(翡色)청자 재현에 성공하게 된다.

우리 선조들이 수백년에 걸친 오랜 시간을 거쳐 완성된 고화도 환원(還元) 불때기 과정을 해겸은 도공 가문에서 축적한 불때기 기술과 더불어 50년간 평생을 바친 노력을 통해, 토기에서 시작하여 자연유(自然釉) →갈유(褐釉) → 녹유(綠釉) → 청자(靑瓷)에 이르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밟아 비색청자의 핵심 기술인 환원 불때기와 태토·유약에 숨겨진 비법(秘法)을 터득, 마침내 비색(翡色)청자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해겸이 비색청자를 구워냈다는 것은 고려의 환원 소성 불때기를 재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동안 어떠한 불을 땠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도요지를 찾아 고려시대 가마를 복원하고 불때기를 통해 비색청자가 재현됨에 따라 적어도 이러한 방법으로 불을 땠다는 가능성을 유추할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고화도 환원소성 불때기를 이용하게 되면 고려청자 재현은 물론 분청사기·백자 등의 기물들도 태토가 충분한 열량을 받아 완전하게 익어 기능성이 높은 프리미엄 도자 제품을 만드는 길을 개척했다.

실제 해겸이 만든 청자는 물론 분청사기·백자 등의 도자기들도 사용자들에 의해 기능성이 상당히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어 해겸이 완성한 고화도 환원소성 불때기 방식을 응용할 경우 우리 도자산업의 국제 경쟁력을 높일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임진왜란전까지 자기(瓷器)를 만들지 못했던 일본은 임진왜란 후에 일본에 자리잡은 한국 도공들 덕분에 비로소 자기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꾸준한 기술 혁신을 통해 유럽에 자기를 수출하는 도자 강국의 지위에 올라섰다.

이후 일본은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여 얻은 막대한 경제력를 바탕으로 열강의 위치에 올라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하고 동아시아를 정복하고 미국과 패권을 다투었으며, 패전후에도 여전히 도자 선진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고려시대에 천하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우리 도자 산업은 조선 후기에 들어 쇠퇴를 거듭하였으며 일제 식민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명함을 내밀지도 못하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명품 프리미엄 도자 제품은 일본과 유럽에 내어주고 중저가 상품은 중국에 치이는 상황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을 비롯한 세계도자와의 격차를 극복할수 있는 핵심 기술은 바로 불때기로 해겸이 완성한 비색청자를 굽는 불때기 기술은 우리 도자산업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핵심 기술이 될수 있다.

우리나라가 반도체· 휴대폰·조선 등의 분야에서 핵심기술을 갖게 되면서 프리미엄 시장 주도가 가능했듯이, 천하제일 비색청자를 만든 불때기 기술로 청자는 물론 토기·분청사기·백자 등 명품 도자기를 만들어 프리미엄 제품시장을 주도하는 도자 르네상스가 펼쳐질 날을 기대해본다.

[ 참고 ] 일본의 고려청자 재현 사기극

현대에 들어 국내·외의 많은 도예가들이 청자 재현에 도전하였으나 고려 비색(翡色)청자 재현에 실패하였으며, 이에 대안으로 과학적으로 분석·제작한 태토와 유약으로 청색을 띤 현대 청자를 제작하였는데, 예술적으로나 기능적으로 고려 비색청자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려청자 재현은 20세기 말까지 와서도 성공하지 못해 일본에서는 사기극도 발생했다. 자칭 고려전승도예연구가 다니 슌제이(谷俊成)는 1990년대에 고려청자를 복원했다고 일본 언론에 발표, 이후 일본은 물론 파리·이탈리아 등에서 도예전을 열며 고려청자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으나, 일본의 언론기사가 한국에 노출5 되면서 사기극이 발각됐다.

그는 1960년대부터 고려청자에 매료돼 도자기 무역회사인 ‘다니통상’을 차린 뒤 1970년대부터 이천지역 도자기를 구입해 일본 도자기 애호가들에게 판매하던 도자기 상인이었는데, 1990년대에 한국 도예가에게 ‘목인(木人)’이란 자신의 낙관을 찍은 고려청자를 주문해 수입한 뒤 자기가 만들었다고 사기극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언론보도를 접한 한국 도예가들과 노력과 정양모(鄭良謨) 전 국립박물관장 등 국내 전문가들의 이의 제기에 다니씨는 결국 사기극이었음을 인정하고 한국에 와서 사죄했다. 일본 도쿄(東京)신문은 2000.11.27일자 1면과 사회면 톱기사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일본인들은 이를 최근 일본열도를 놀라게 한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의 고고학 유물날조 사건에 버금가는 충격적인 사기극으로 받아들이고있다.

그리고 마침내 고려 비색청자 재현은 경주의 도자 장인 해겸 김해익에 의해 실현됐다. 그는 지난 2016년말에 ‘맑고 은은한 비취색의 고려청자 제조방법’이라는 독특한 명칭의 특허를 취득, 그가 평생을 바쳐 밝혀낸 고화도 환원 소성을 통한 고려 비색청자 제작 비법에 대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인정을 받았다.

미주)

  1. 청자의 비색은 흙(胎土)의 색도 아니고, 유약(釉藥)의 색도 아닌, 태토와 유약에 포함된 철분 성분이 불을 만나 고온 상태에서 산화와 환원이라는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 비색(翡色)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최근의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비색의 비밀은 불때기(환원소성과 산화소성)를 통해 태토와 유약에 함유된 철 이온(Fe2+)을 변화시키는데 달려있다고 한다. 유약에 포함된 약 1~3%의 산화제2철(Fe2O3)이 1,250~1,300℃도의 고온에서 발색을 하게 되는데 산소가 충분한 상태에서는 황색·갈색·적색 등을 띠고, 산소가 부족한 상태에서는 유약이나 태토에서 산소와 결합해 있던 산화제2철이 산소를 빼앗겨 산화제1철(FeO)로 환원되어 파란 빛을 띠게 된다. 환원소성을 화학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Fe2O3 + CO -> 2FeO + CO2 ↩︎
  2. ‘소매 속에 간직할 귀중한 것’이라는 의미. ↩︎
  3. 陶器色之青者, 麗人謂之翡色, 近年以來, 制作工巧, 色澤尤佳 ↩︎
  4. 문화일보 2013. 11. 21. ↩︎
  5. 2000년 4월 니혼게이자이신문(日本經濟新聞)에 다니씨가 고려청자의 비법을 밝혀냈다는 기사에서 다니씨는 “한국정부의 요청으로 30년 전부터 고려청자 복원에 매달려 지금까지 1,200여 점의 고려청자를 제작했다”고 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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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범: 서울대 건축학과 졸업. 사단법인 한국도자문화협회 상임위원 등 역임. 역대 최대 규모 전시회인 <한중 도자명인 100인전>(2009) 기획총괄 등 미술 및 도자기 전시 기획과 자문, 평론가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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